방천리 이야기

방천리는

방천리(芳川里)는 화천군 동면 지역으로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있다고 하여 방천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내, 후동, 진부터, 갓골, 운수골, 물안골, 골방천과 동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방천리라 하고 간동면에 편입시켰다.

옛사진 / 출처 : 강원의 설화(국회도서관)
화천댐 / 출처 : 일본 카지마 건설 실적부

방천리는 1935년 이전에는 큰 마을이었으나 일제시대 태평양 전쟁의 산업 전력 동원을 위한 화천댐 건설(1939~1945년)로 마을의 대부분이 물에 잠기어 주민들은 다른곳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남은 주민들은 산비탈과 골짜기에 마을을 이루어 살고있다.

1960년대 설악재를 중심으로 동쪽은 방천1리, 서쪽은 방천2리로 나누었다. 방천1리는 신재(新材), 갓골, 김부터, 전골, 둔전, 부대골, 후동 등 4개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몰 후 방천지역의 일부인 신촌은 배를타고 들어가야 하고 전골, 둔전말은 개발로 인해 주민들이 살지않는다. 방천2리는 석전동, 운수골, 골방천 등으로 이루어졌다.

방천 집안 선산 진입로 사진
방천리 진입도로 사진

방천리 관련 기록

1912년대에 읍내장(상리)이 2·7일, 상서면 산양리에 산양리장이 3·8일, 인마리장(人馬里場)이 1·6일에 개설되는 등 3개의 장이 개설되었었다. 1926년대에는 읍내장과 간동면 방천리의 방천리장(芳川里場)이 1·6일에 개설되었다.

2007년 파로호 주변에 나누어진 50개의 부락 중 신내마을(주소명:강원도 화천군 방천1리)로 불리는 옛 방천리의 일부가 남아 10개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출처:2017년 1월7일 KBS다큐공감에서
同 강원도 화천편 방송분 7분 31초 장면

갓골과 마당재의 유래(설화 구술 기록)

여기가 한문으로 적으면 입동, 그리고 갓이라고 했어요. 갓입자(笠)를쓰거든요. 갓입자를 써서 갓골이라고 했어요. 여긴또 그전에 마당재라고 이름을 졌어요. 여기가 마당재고 지금 마을에서 들어오는데 가갓골, 갓입자를 써서 갓골. 그전에 대지가 일곱개가 있는걸 보면 옛날에 일곱 사람이 살지 않았는가. 일곱 농가가. 마당 같이 되어 있다고 저기 쫓겨 올라가서 마당같이 생겼다고 마당재라고 그랬어요.

둔전말의 유래(설화 구술 기록)

이 부락의 그 전에 둔전이라고 하는것이 있는것을 보면, 저기 2반에 둔전말이라는 것이 있어요. 둔전말이라는 것은 말자체가 군사를 주둔하고 장기전에 대비한 그러한 농사를 지었단 얘기지. 그러니까 둔전말이죠. 둔전제도가 있을땐 옛날 고려조에도 둔전제도가 있었다 그래요. 여기 화천이 전반적으로 평야지대는 다 수몰 되었고, 산으로 된 전지(田地)는 군인들이 차지하고 농민이 차지하고 반반 차지했다고 보면돼요. 서로 군이 더 차지 하겠다고 하면 민간인이 불편하고 그런게 있어요.

유래 설화를 구술해 주신분

이기환은 1989년에 원주에서 이사를 왔다. 직장 때문에 화천에 왔다가 정착하게 되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만 하더라도 마당재에 10가구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4가구만 살고 있다.

이기환은 마당재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이다. 과거에는 주로 잡곡 농사를 많이 지었으며, 마당재에서 쌀이 60~70가마 정도가 수확이 될 정도로 논농사도 많이 지었다고 한다. 그 후 만 오천평에다 과수농사를 하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고랭지 채소농사를 짓고있다.

조사자들이 갔을 때도 김장용 배추를 삼고 있었다. 올해는 비가 많이와서 일조량 부족으로 모든 농산물 수확이 좋지 않다고 걱정이 많았다.

이기환(69,남)
장소 : 화천군 간동면 방천리
시기 : 2003.9.4

출처 :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강원의 설화1(543페이지) /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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