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천 집성묘 이야기
매년 본가 묘소의 벌초를 위하여 집성묘에 오르게 되면 오래된 선조(先祖)의 묘비들이 있다. 그곳은 1939~1945년까지 화천댐이 들어서고 본가가 방천(芳川)에서 떠나오기 전, 당시 수몰의 피해 산중턱으로 이장을 한 오래된 집안의 집성 묘터이다. 돌아가신 증조대(曾祖代)의 어르신들, 그리고 그 이전 조상님들의 묘비로 구성된 곳이다.
어려서 부터 나는 자세한 묘비의 이력을 전해듣지 못하였다. 당시 집안의 어린 막내로 수몰된 호수를 건너 험로를 올라야 하기에 뵐 기회가 없었다. 귀국 후 벌초에 참여하게 되면서 직계묘 뿐만 아니라 집안의 집성묘를 찾아 뵙게 되었는데 오래된 묘비들 중 흐릿한 묘표(嘉表)가 눈에 띄었다.
세월이 할퀴어간 묘도문자에는 부인이신 配位O人金海金O과 嘉O大夫李OO라고 새겨져 있다. 다른 묘석과 다르게 품계(嘉O大夫)가 있어 궁금했다.
이에 집안 어른의 품계(品階)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니 종2품의 품계인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추정됐다. 묘석 후면의 문자들이 세월에 허물어져 한자의 형태를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896년생이셨던 증조할아버지, 그 이전대(以前代)의 묘비들로 작은할아버지께 들은 바 있어 조선 말기의 품계를 조사해 보았다
가의대부라는 봉작은 조선시대 문, 무관으로 지방관직(地方官職)을 하셨다면 조선 초 관찰사에 해당하는 외관직(外官職)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본 지역이 중요 군영(軍營)지역으로 무관직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관직으로 추정될 수 있으나 조선 말기, 군 체계의 폐단으로 병마절도사가 폐인되는 시기와 겹쳐, 회손된 묘도문자가 모두 확인되지 않으면 정확한 관직을 알수 없다.
관직과 해당하지 않는다면 고종 2년(1865년) 왕족의 먼 종친은 모두 종2품으로 통일하도록 하여서 관직이 없는 단지 집안의 종친계(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를 사용했을것으로 추정한다. 집안 묘비 중 학생지묘(學生之墓:관직에 해당하지 않는 망자의 묘표)를 사용한 묘석도 있기에 조선 말 가문의 사연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서물(書物)이 전해지지 않는 점이 아쉽다.
기회가 된다면 묘도문자가 더 회손 되기전에 묘석을 탁본하여 사료를 정리했으면 한다.
품계명 가의대부(嘉義大夫)
1522년 (중종 17년) 가정대부(嘉靖大夫)에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당시 명나라 세종이 새로 즉위하여 연호를 ‘가정(嘉靖)’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이를 피해 고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가정(嘉正)’으로 고쳤다가, 음이 같다 하여 다시 ‘가의’로 개정하였던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영록대부(榮祿大夫)에 해당한다. 또한 왕가의 먼 종친계의 경우 1865년(고종 2년) 이후 부터 문산계의 종2품의 품계명(사건대부, 가의대부)을 사용하게 되었다.
품계의 정의
조선시대 종2품 상계(上階) 문관, 무관에 해당하며 조선시대 18품계 중 제4등급의 품계에 해당한다.
출처: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